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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자전거로 미시령 넘어 속초에 가서 껌 사 오기, 하루 만에


2009년 봄에 근무처가 여의도에서 일산으로 바뀌면서
5월경부터 자전거로 출퇴근을 시도한 게
어느덧 반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2008년식 알톤 알로빅스 500 플러스 17.5인치 중고로 자전거를 장만하고
혼자서 주 2회 정도 자출을 두어 달 하다 보니
남들은 어떻게 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배워야 할 것도 많아 보여서
네이버 까페 "자출사"(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를 수시로 들락거리다가
9월에는 자출사의 소모임인 "여의도 모임" 일요일 번개에도 나가서
송산과 대부도, 시화 방조제를 넘어 하루에 160Km를 달려 보기도 했습니다.

2009년 12월이 가까워 오자,
그동안의 자출 생활을 결산하고 또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한 계기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로 미시령을 넘어 속초를 다녀오는 라이딩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로
 - 사람의 발로만 페달질을 해서 -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 속초를 당일에 갔다 온다."

자전거와 친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처음 들으면 황당하기 그지 없는 말이지만,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자출족들은 그게 그렇게 엉뚱하게만 들리지도 않습니다.

수도권에서 속초까지 140~200km 정도고, 자출족 자전거 평균 시속이 20km 정도는 되니까 
밥먹고 쉬는 시간 빼고 7~10시간 정도 달리면 됩니다.
새벽에 일찍 출발하거나, 중앙선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국수역에서 내려 출발하면
부지런히 달려서 해 넘어가기 전에 미시령을 넘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속초에서 저녁을 먹고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돌아오면 됩니다.

그들은 속초행 라이딩 중에 제일 힘든 구간인 해발 777m 미시령 고갯마루에 올라선 뒤에
다들 자신이 대견해서, 자신의 자전거가 자랑스러워서,
미시령 글자가 들어간 표지판을 배경으로
또는 미시령 휴게소에서 고개 넘어 아스라히 보이는 속초시내와 동해안을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인증 사진들을 찍어서 자출사 등의 까페나 자신의 블로그에 올립니다.

(아래 사진들은 제가 "자출사" 게시판에서 본인들 동의 없이 임의로 가져왔습니다. 문제되면 삭제하겠습니다.)


(이하 사진은 "자출사" 오리님의 작품이며,
 모델은 소모임 ‘해지고어두운토요일밤’, ‘월수夜’, ‘화목夜’의 번짱들 및 참석자들입니다.
 2009년 10월의 마지막 날 비 맞아 가면서 미시령 올라가서 찍은 사진들이며,
 
이 사진들도 오리님 이하 모델들의 동의 없이 올립니다.
 이날 같이 못 간게 억울해서...)

 

(위 모델은 사진에 일가견이 있는 ORI님인데... 본인이 본인 사진을 찍지는 않았을 텐데...)

(위 가운데 모델이 ‘월수夜’ 번짱 지요님 / 아래 모델이 ‘화목夜’ 번짱 재키님)


(위의 V자 손가락의 모델은 ‘천사의격려’님 / 아래의 모델은? 닉 까먹었음)


(위 사진 가운데 모델들은 왼쪽이 '마이클 판타니'(옹), 오른쪽이 '(잔차의전설)북극곰'님)


"그 먼 속초까지 뭐 하러 자전거 타고 가셨습니까?"하고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물어보면,
마치 별 거 아니었다는 듯이 대답들을 합니다.

"으응, 껌 사러."
"으응, 새벽에 잠이 깼는데, 속초 바다 맑은 공기 쉬면서 담배를 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길래."

그래서 속초에 껌, 담배 사러 가는 것은 "잔차인들(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로망"이라고 불립니다.

자출족중에는 자출 3개월만에 시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띠도 가고, 돼지띠도 가고, 쥐띠도 가는데, 소띠가 못 가란 법이 있습니까?
60대도 가고 50대도 가는데, 40대가 안 갈 수 있겠습니까?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11월에야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도 속초 간다.

결심을 하고 따라갈 모임을 찾아보는데, 이미 11월이라 단체 라이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의도 모임"의 마이클판타니옹이 번짱으로 나선 10월 31일(토) 속초 라이딩은
다른 개인 약속도 있고, 날씨도 안 좋아 끼지 못 했습니다.

이미 해도 짧아지고 날도 추워져서 속초 갔다 오기에는 별로 좋은 철이 아닙니다.
내년 봄을 기다릴까 하는데, 11월에 자출을 해보니 그다지 춥지는 않습니다.

11월 28일 토요일, 인삼 싸게 사려고 자동차로 풍기를 다녀오는데, 날이 푸근합니다.
그래 까짓거... 하고 뒷날 11월 29일(일요일)을 거사일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서울로 가던 차를 돌려 홍천에서 44번 국도로 들어서 코스를 답사했습니다.
신남, 인제 등등 군데군데 업힐이 그리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는데,
(돌아올 때 보니 착시였습니다. 최소 1km 이상의 심각한 업힐 구간이 네 군데씩이나...)
내설악 광장 휴게소부터는 도로 공사중이라 갓길도 없고 상당히 신경쓰이는 구간이었습니다.

미시령 터널로 가는 새길과 미시령 휴게소를 거치는 옛길의 갈림목에 들어서니
차량 통제 현수막이 얼핏 보이는데, 막상 통제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늘은 초저녁이라 어둑어둑한데 나지막이 내려앉은 구름이 가랑비를 아주 조금씩 뿌리고 있었습니다.
폭설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빗방울입니다.
잘못 된 현수막이겠거니 무시하고 올라가는데,
몇백 미터도 못 가서 맞은 편에서 내려오는 차가 라이트를 계속 껐다 켰다 합니다.
차 속도를 줄이고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길이 막혀 못 간답니다.
설마... 하고 기어코 올라가 봤는데, 아예 철문을 꽁꽁 묶어놓고 통제를 합니다.


사진을 찍고 차를 돌리니 그제서야 이미 산봉우리에  덮인 하얀 눈들이 시야에 들어 옵니다.


말 그대로 좌절이었습니다.
올해(2009년)에는 확실히 포기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못 간다고 생각하니 꼭 가보고 싶다는 욕심은 더 커집니다.

12월 31일부터 중앙선 전철이 용문까지 연장 운행된다고 하니,
그날 새벽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용문에서 출발하면 거리가 140km 정도로 단축되니까
날씨만 춥지 않고, 미시령에 눈만 없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엔진이라도 다듬어 놓으려고 했으나,
12월에는 여의도 출근이 잦아져서 자출을 못 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12월 13일 일요일에는 억지로 탄천을 따라 로드로 단국대 죽전캠퍼스까지 100km를 왕복하였습니다.
날은 추운데 땀에 젖은 면 삼각팬티의 고무줄 부분이 사타구니에 계속 쓸려서 고통의 라이딩이었습니다.  

12월 21일, 자출사에 어느 분이 올린 글을 보니,
중앙선 전철 용문역까지 개통 날짜가 12월 23일로 당겨졌다고 합니다.
12월 23일, 기상청 일기예보 - 내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기온이 겨울답지 않게 푸근하다고 합니다.
하늘이 나를 올해 안에 속초 갔다오라고 떠밀고 있습니다.

그래, 올해 안에 속초 가는 거야!

12월 중순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가능하면 올해 안에 속초를 갔다 오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다닙니다.
그래야 창피해서라도 갔다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거리가 얼마나 되냐고 사람들이 걱정스레 물어봅니다.
140km밖에 안 된다고 큰소리칩니다.
대개 자전거로 이동할 때는 지도에서 재는 거리보다 최대 10%까지 늘려 잡아야 한다는 거 알면서도...

12월 23일 밤.
아무래도 유사MTB 알톤 알로빅스 500+의 두꺼운 1.95 타이어로는 마음이 안 놓입니다.
속초를 이미 다녀온 선배들의 충고 중에 하나가
가능하면 가벼운 자전거, 가벼운 타이어로 바꿔 타고 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꽃 메리다 로드 880 (09년식 중고)으로 가는 것으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네이버와 다음과 구글 Earth를 들어가서 라이딩 시뮬레이션을 해봅니다.

(용문역에서 나와서 바로 좌회전해서 국도로 들어가기 보다는 우회전해서 워밍업 후에 올라가야지...)


(그랬을 때 내가 보게 될 실제 도로 광경을 다음 지도 서비스의 로드뷰로 보면서 이미지 라이딩)


(다음 로드뷰가 없는 코스는 구글 어쓰의 3D 지도로 코스 사전 답사)

내일을 위해 잠을 푹 자야 하는데, 도무지 잠이 오질 않습니다.
새벽 1시쯤에 간신히 선 잠이 들었으나, 핸드폰 알람이 예정된 4시 30분 여지없이 울립니다.
일어나서 홍삼꿀물 한 잔 마시면서 정신을 차려봅니다.
물을 끓여 블랙 커피를 타서 머핀 한 조각과 함께 허기를 메웁니다.
옷을 먼저 챙겨봅니다.
속에는 쿨맥스 등산용 속옷을 먼저 입습니다.
죽전 갔다 올 때 면팬티때문에 고생했지만, 쿨맥스는 괜찮을 거라고 착각해봅니다.
유니클로의 히트텍 내의 바지를 입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날이 별로 안 춥고 조금만 달리면 몸에서 열이 날 테니까 필요없을 거라고 착각해봅니다.
"자여사"(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에서 공동구매한 겨울 팀복 - 기모 져지와 바지를 입고,
겉에는 봄가을용 홑겹 방풍 점퍼를 입습니다.
장갑은 두터운 스키장갑보다는 얇아서 기동성이 쥐꼬리만큼 우수한 등산용 장갑입니다.
고글은 겨울용 무색 3M 산업용 고글입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몸을 놀리다가 식탁 의자 모서리에 이마를 찧었습니다. 밴드를 살짝 붙였습니다.
셀카를 찍어봤는데, 영 아니올시다 입니다.
 

짐은 최대한 생략합니다. 똑딱이 카메라와 핸드폰, 신용카드 2장, 현금 조금만 챙깁니다.
펑크패치 세트는 기본이고, 비상용 튜브와 Q5 전조등용 비상 배터리는 1개씩만 가져갑니다.  

새벽 04시 50분쯤 조금 못 미쳐, 메리다 880을 타고 집을 나섭니다.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조각모자를 빠뜨려서 헬멧 사이로 매서운 겨울 새벽바람이 들이칩니다.
돌아가서 가지고 나올까 말까, 열차 출발시간에 빠듯하지는 않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몇 백 미터를 더 전진합니다.
에이, 그냥 가자. 얼어죽지는 않겠지.

새벽이라 통행 차량이 드물어서, 모처럼 차도로 들어가 원효대교를 넘어봅니다.
5km 조금 넘는 거리를 달려 용산 아이파크 건물로 들어가 용산역 개찰구쪽에 들어서니
용문행 첫차 출발 시각 05시 20분까지는 아직 시간 여유가 있습니다.
일요일이 아니기 때문에 코레일 직원들 눈치를 보며 메리다를 중앙선 전철 플랫폼으로 들여 놓습니다.
용문 가는 전철 차량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일요일에도 자전거는 당연히 첫칸이나 마지막 칸에 실어야 합니다. 남쪽 칸이니까 마지막 칸이겠지 착각해봅니다.


열차에 오르기 전, 오늘의 내 운명을 짊어진 메리다 880을 한 번 더 찍어봅니다.
이 모습이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한 컷을 찍고 나니 똑딱이 디카(파나소닉 DMC-FX36)의 밧데리 잔량 표시가 3개에서 2개로 줄어듭니다.
어젯밤에 확인할 때 분명 3개라서 안심을 하고 충전을 하지 않았는데...
손떨림 방지 등 각종 옵션을 걸어놔서 밧데리가 빨리 닳는 건지, 아니면 밧데리 수명이 벌써 다 된 건지...
똑딱이는 어쩔 수 없다고 착각을 해봅니다. 

이제부터는 중요하지 않은 사진은 무조건 핸드폰(삼성 미라지 M-620)으로 찍어야 할 판입니다.
사진이 좀 구리겠지만 할 수 없습니다. 디카 밧데리를 아껴야 미시령 인증 샷을 건질 수 있습니다.

열차에 올랐더니, 코레일이 상당히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의 코레일이 아닙니다.
새로 개통한 중앙선 전철 열차는 일요일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한산한 시간에는
맨 앞, 맨 뒷 칸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자전거 안 실어주면 어떻게 하지 했던 고민은 쓸 데 없는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거치할 공간은 아직 차량 내부에 없습니다.
살짝 운전실쪽 공간의 벽에다 기대봤으나, 앞뒤로 흔들리는 데는 대책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좌석과 출입문 사이의 공간에 세우고 손으로 거치해서 데리고 갑니다. 1시간 30분 넘게......
 

새벽 첫 차 치고는 승객이 꽤 됩니다.


전철은 05시 20분 정시 출발을 하는데,
어랍쇼, 청량리로 가는 열차가 북쪽으로 안 가고 남쪽 - 한강쪽으로 전진합니다.
그래서 제가 있는 칸이 이제 보니 맨 뒷 칸이 아니라, 맨 앞 칸이었습니다.

이촌역을 시작으로 청량리를 거쳐 덕소역 쯤 오니 승객은 거의 없습니다.
새로 개통한 국수-용문 구간에서는 안개가 껴서 서행중이라고 안내방송을 합니다만,
차창 밖은 동지를 막 지난 12월 24일 새벽이라 캄캄해서 제 눈에는 안개가 보이지 않습니다.
덕분에 예정보다 10분쯤 늦게 07시가 다 되어 용문역에 도착했습니다.

집에서 미처 못 본 큰볼일을 용문역에서 보고 역사 밖으로 나와보니,
중앙선 전철 구간의 다른 역들처럼 용문역도 꽤나 말쑥하게 새 단장을 했습니다.
핸드폰으로는 도저히 찍히지 않을 거 같아서 똑딱이를 꺼내서 용문역 역사를 찍었습니다.


역앞 길에는 아침을 하는 식당이 두 군데 보입니다.
한 곳은 턱을 넘어 가야 해서 턱이 없는 집으로 가서 물어보니 해장국이 안 된다고 합니다.
빨리 먹고 출발하려면 해장국 종류에 밥 말아 먹고 가야 하는데.
별 수 없이 신장개업 네 글자 적힌 종이를 붙여 놓은, 문턱 높은 집으로 가서
5천원짜리 우거지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합니다.

새벽 영업에 피곤한 듯한 아주머니 얼굴에는 고단한 중년, 고단한 시골 소읍의 퇴락한 주름살이 패여 있었지만,
그때문인지 우거지는 시골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07시 45분, 식당을 나와 속도계를 세팅하고 출발합니다.
용문역에서 6번 국도를 타는 지름길은 왼쪽이지만,
몸을 데우기 위해 오른쪽으로 가서 341번 지방도를 거쳐서 6번 국도로 올라 탑니다.
조금만 더 달리면 6번 국도는 오른쪽으로 갈라지고 곧바로 가는 길은 44번 국도로 바뀝니다.

해가 뜨기 전이라 날씨는 꽤나 춥습니다. 낮에는 최고 8도까지도 올라간다지만, 지금은 영하의 기온이 틀림없습니다.
구름 낀 흐린 날씨지만 비는 오지 않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경기도, 강원도 산길의 겨울 바람은 만만치 않습니다.
양평, 홍천 쪽에는 하얀 알갱이들이 도로가에 쫙 깔려 있습니다.
이쪽에는 지난 밤에 우박이 퍼부었다고 착각을 합니다.

우측 차로 끝부분을 차지하고 달리는데, 도로 사정이 썩 나쁘지는 않습니다. 달릴 만 합니다.
크 걱정을 좀 줄여도 될 거 같습니다...만, 갑자기 펑크 패치용 본드를 놓고 왔다는 걸 깨닫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가다가 본드 살 곳이 보이면 사야 겠습니다.

대략 50분 주행에 10분 휴식하고 평균시속 25km로 달려서 미시령 휴게소에는 이르면 15시에 도착할 욕심이지만,
아직 영하의 아침이고 몸도 덜 풀린 상태라 평속이 욕심만큼 나오지를 않습니다.

첫 휴식은 50분보다 빨리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때마침 제법 큰 클린턴 휴게소가 보이길래 들어 갔습니다만.

망했습니다, 보시다시피. 바로 왼쪽 주유소도 같이.

이때가 08시 25분쯤. 40분쯤 달린 셈입니다.
할 수 없이 다음 휴게소가 나올 때까지 5분쯤 더 달렸습니다.
산천휴게소가 나옵니다.


물을 한 병 사서 집에서 챙겨온 종합 비타민 등을 먹으며 물어보니, 클린턴 휴게소는 사업 확장하다가 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휴게소 아저씨가 이 날씨에도 속초 갈 수 있냐고 물어옵니다.
화장실에서 소변 보고 나와서 주위를 살피니, 눈옷을 입었는지, 서리가 내렸는지 산의 나무들이 허옇습니다.
맞은 편 산의 나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날씨가 꽤나 춥습니다. 유니텍 입고 올 걸... 하고 후회합니다.

건너편 휴게소 이름이 인상적입니다.


08시 45분쯤, 다시 메리다 880에 올라탑니다.
지명은 양평군에서 홍천군으로 넘어갑니다.
해가 뜰 시간이 지났는데, 구름이 낀 때문인지 기온은 계속 떨어지는 거 같습니다.
바닥은 군데군데 얼음도 얼어있고, 녹은 부분에는 흙들이 깔려 있어서, 라이딩에는 별로 안 좋은 상황입니다.
그래도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곧이어 며느리고개(신당고개?)가 나타납니다.
속도가 떨어집니다. 평속 25km는 희망사항일 뿐이요, 착각이었음이 곧 밝혀집니다.
며느리고개터널은 길이가 길지 않고 그럭저럭 지나갈 만합니다.

44번 국도는 홍천읍을 오른쪽으로 우회하는데, 우회로의 경사도가 제법입니다.

1시간 넘게 가도 휴게소가 없다가 홍천 만남의광장 휴게소가 나타납니다.
쉬면서 오뎅도 먹고 홍삼꿀물로 목을 축이고 비상식량으로 스니커즈 두 개를 3천원에 삽니다.

이때 쯤에는 몸에 열이 적당히 올라서 춥지가 않습니다.
이럴 때는 너무 쉬면 몸이 식기 때문에  휴식시간을 짧게 끊습니다.

다시 44번 국도를 가는데, 얼었던 도로가 녹으면서 도로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등 뒤로 물에 뭉쳐진 흙먼지가 등 뒤로 다람쥐 줄무늬를 만들고 있습니다.
길에 뿌려져있던 우박들은 많이 녹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박이 아니라 염화칼슘이나 소금 알갱이인가 봅니다.

말고개를 지나 철정터널을 통과하는데, 터널 안은 자전거가 다니기에 심하게 불편합니다.
도로 가장자리 배수구 홈들을 빨래판 지나가듯이 덜덜거리면서 지나 가야 합니다.

조심조심 터널을 빠져나오니 오른쪽으로 군데군데 얼기 시작하는 화양강이 나옵니다.
강을 따라 달리기 때문에 그런지, 기온은 더 떨어지고 찬바람은 세차게 불어옵니다.
잠깐 쉬면서 한 컷 찍어봅니다.
팜파스 휴게소가 500m 앞에 있다는 표지판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1km쯤 걸렸던 것 같습니다.


똑딱이 카메라의 밧데리 충전 표시가 갑자기 빨간 경고등을 깜빡입니다.
이제 미시령 인증 샷때문에라도 핸드폰으로만 사진을 찍어야 할 판입니다.
재수 없으면 밧데리가 바닥나서 더 이상 디카로는 사진을 찍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40분쯤 달리다 건니 고개 업힐을 앞에 두고 목 한 번 더 축이기 위해 휴게소를 찾는데, 휴게소가 안 보입니다.
그냥 길 가에 서서 물 마시고 주변 사진 찍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수도가 보이십니까?


건니 고개를 낑낑 대고 올라가서 다운힐을 목전에 두고 제대로 된 휴게소를 찾는데
인제 만남의광장 휴게소는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고, 마침 청정조각공원휴게소가 보입니다.
동향과 남향이 산으로 막혀 있어서 왠지 음산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별로 좋은 땅이 아닙니다.
들어갔더니 남자의 양물과 여자의 나신을 새긴 나무기둥과 자기 술잔 등등이 잔뜩 보입니다.
이름에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마즙은 겨울이라 없다면서 칡즙(갈근탕)과 헛개나무차(벌떡차)를 섞은 따뜻한 2천원짜리 음료를 권합니다.

이때가 11시 30분쯤.
시간이 점심을 먹기에도, 안 먹기에도 애매했지만, 문제는 이 휴게소에는 마땅한 점심 메뉴가 없습니다.
불과 몇 분 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인제 만남의광장 휴게소를 갔으면 갈등없이 점심 먹고 푹 쉬었을 텐데...
좀 더 달려서 내설악 삼거리휴게소에서 제대로 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다시 달립니다.
(복귀후 찾아보니, "건니고개 기사님 식당" 제육볶음을 먹고 건니고개를 넘는 쪽으로 추천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홍천군을 떠나 인제군으로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제법 길게 뻗은 약한 경사의 다운힐이 이어집니다.
기온이 상당히 올라서, 하반신 바지 속에는 땀이 차는 것도 느껴집니다.
믿었던 쿨맥스 팬티가 사타구니 살갗을 다시 괴롭혀 무지 쓰라립니다.
열흘 전 죽전 갔다올 때 면팬티에 쓸려 피가 비쳤던 곳이 다시 출혈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바지속 습기가 배출이 안 되고 있으며, 남은 코스 내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징조입니다.
(그때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이런 경우 아예 속옷을 벗고 달리는 방법이 정답이었습니다.)

근육에는 피로가 쌓여 슬슬 페달질이 힘겨워집니다.
속도는 평균시속 20km 언저리만 맴돌고...
15시까지 미시령을 넘겠다는 당초 계획은 한 시간 정도 지연될 거 같습니다.
겨울철이라 체력의 소모는 훨씬 더 심한 거 같습니다.
더구나 홀로 라이딩이라 단체 라이딩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체인과 스프라켓에는 우중라이딩처럼 모래와 흙이 달라붙어서 기어의 움직임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지나온 도로 곳곳에는 로드킬의 흔적이 보였습니다.
흔적 정도가 아니라 아예 따끈따끈한 사체들도 보입니다.

봄, 여름, 가을이면 특히 주말에 많은 사람들이 속초 라이딩을 한다는데, 오늘은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정말 외롭고 심심한 라이딩입니다.

신남을 지나 소양호 상류 유역을 지나면서 38선 휴게소, 군축교 만남의광장 휴게소를 스쳐갑니다.
인제대교를 지나면 인제터널이 나오고, 터널을 빠져나오면 인제읍내입니다.
몸의 속도는 점점 늦어지고,
머리는 몸의 괴로움과 지겨움을 잊고 싶은 듯 생각의 꼬투리를 끄집어 냅니다.
그러면서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려 봅니다.

영화 "첨밀밀"에서 여명이 홍콩과 뉴욕에서 타던 짐자전거.

                                  
                                                

영화 "마지막 황제"의 첫 장면이던가, 문화혁명시절 북경 시내 출근 시간의 엄청난 자전거 군단들의 신호 대기 장면.

80년대 울산, 포항의 제철공장, 자동차공장, 조선의 이침 출근 자전거 행렬들...

대학 졸업후던가, 해운대 백사장 앞 아스팔트 공터에서 빨간 대여자전거로 처음 자전거를 타던 모습.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경북대 박찬석 총장의 기사를 읽고 감동받았던 시절.

80년대초 한국일보 김훈기자가 자전거로 전국을 다니면서 쓴 한 면짜리 특집 기사를 읽던 기억.

2000년대 초 벚꽃철에 한강변에서 우연히 본, 헬맷과 져지 차림의 당시로서는 꽤나 선구적이었던 할머니 라이더들.

2002년 근로자의 날, 철티비로 일산에서 회사까지 가보다가
일산 능곡의 삼성당마을 내리막길에서 앞브레이크 잡고 앞으로 자빠졌던(소위 잭 나이프) 기억.

나에게 자출을 시도하게 만들고, 자전거를 즐기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많은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코스의 반을 지나왔다,
지나온 거리가 아까워서라도 계속 가야 한다,
속초까지 가는 것보다 지금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가는 길이 더 힘들다,
인제 다 왔다, 거의 다 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속초는 누구나 가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켜 페달을 굴려봅니다.

인제터널 입구가 보입니다.
이 터널은 길이가 꽤 긴 편(1km?)임을 알기 때문에 후미등 두 개를 다 켜고 들어갑니다.
터널에 들어선 순간, 이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낍니다.
차선 구분 돌출물(일명 캣아이?), 돌과 자갈, 배수구멍, 대형차량들의 통과음, 좁디 좁은 갓길 등등,
여기는 자전거가 갓길로 통과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터널입니다.
단체로 또는 지원 차량의 도움을 받아 차선 안으로 들어가서 지나가야 합니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은 이미 늦었습니다.
별 탈 없기를 바라면서 간신히 지나가는데, 바로 앞에서 어른 주먹 두 개 크기의 돌이 바닥에 보입니다.
돌이 너무나 크고, 뒤늦게 보였기 때문에 피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자전거를 차가 없는 오른쪽으로 넘어뜨리자. 그게 그나마 덜 위험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급브레이크를 경계하면서 지나갑니다.
분명 돌을 못 피한 거 같은데, 다행히도 아무런 충돌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인제 터널이 그렇게 위험한 줄 미리 알았다면 끌바로 터널을 지났을 겁니다.)

공포의 인제
터널을 빠져나오니 인제읍내가 보입니다.
속도계는 조금만 있으면 100km를 지날 것 같습니다.
100km가 되면 "그 분"이 마중을 나와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만,
99.5km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속초 45km” 표지판이었습니다.


이제 2/3을 넘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15km는 미시령에서 속초까지 내리막길입니다.
안장에 앉아만 있어도 내려갑니다.
그러니까 이제 30km만 버티면 됩니다.
시간은 12시 50분.
빨리 내설악 휴게소를 가서 점심을 먹고 쉬어야 합니다.
13시 45분, 드디어 한계 삼거리에 있는 "내설악 관광 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황태국으로 점심을 때우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어젯밤 수면이 부족한 탓도 있어서인지 자꾸만 눈꺼풀이 감깁니다.


휴게소 난로는 나무를 땔깜으로 쓰는 난로라 잠을 자기에는 무척 추운 편인데도, 몰아치는 잠을 쫓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는 잠은 피로 회복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될 텐데 생각하면서도,
식당 식탁에 고인 팔에 얼굴을 걸치고 비몽사몽간을 헤매다녀 봅니다.


14시 45분, 휴게소를 나와 왼쪽 방향 - 북동쪽으로 46번 국도를 탑니다.
이때까지 달려온 44번 국도는 남동쪽으로 한계령을 향합니다.
이제부터는 갓길이 없어서 조심조심 가야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임시개통했다는 "한계터널"이 나타납니다. 앞 터널이 2km 정도, 뒷 터널이 1km 정도.
새해 동해 해맞이 관광객들을 위해 임시개통했다고 합니다.
(2010년 1월에 갔다온 K가이드님에 따르면 다시 통행금지되었다고 합니다. 언제 정식 개통할지)

속은 임시개통답게 먼지가 자욱합니다. 뒷터널은 조명등도 꺼져 있습니다.
한계터널 덕분에 공사중인 차로에서 차들과 함께 달려야 한다는 부담도 덜고, 거리도 줄어들 거 같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분"을 못 보고 지나칠 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터널을 빠져 나와 좀 더 달렸습니다.
시각은 15시 20분.
갑자기 내 고향 스페인 안달루시아 평원의 풍차 거인들이 보입니다.
아니, 이 놈들이 언제 되살아 났나? 분명 내가 창으로 무찔렀는데.

I am Don Quixote, the Man of La Mancha!!!



10분을 더 달려 15시 30분.
황태 덕장들과 황태음식점들이 몰려있는 마을까지 도착했습니다.
며칠 전 중앙일보에서 읽었듯이 명태를 구하지 못해 놀리고 있는 덕장들이 많이 보입니다.


또 10분을 더 달려 15시 40분.
갑자기 예상도 못 하고 있던 "그 분"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속초까지 13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아마도 미시령 꼭대기, 인제군과 속초시의 경계지점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미시령까지 13km, 미시령 정상에서 속초까지 15km로 추정하고
지금까지 달려온 거리는 117km입니다.
(사실은 그 지점에서 누적 거리를 속도계로 확인했는데, 시일이 경과한 바람에 기억이 희미합니다.)

충남 홍성에서 출생한 "이 분"의 얼굴이 여기에 세워져 있는 것은
"이 분"이 근거지로 활약했던 사찰이 설악산 백담사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물론, 그 유명한 시 "님의 침묵"도 백담사에서 썼답니다.
일제 말년에는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에서 재혼한 아내와 딸과 함께 살면서
"일본 통치 하에서는 절대로 호적을 만들지 않겠다"고 하여
딸 한영숙을 호적에 올리지 않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은 채 1944년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알레르기 반응같은 반일감정만이 민족과 국가를 위한 길일까요?
너무나 단순한 애국심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파멸로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에
저는 이제 더 이상 "이 분"같은 분들을 존경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스님인데, 왜 승복이 아니라 한복을 입고 있을까요?

기념으로 모처럼 셀카를 찍어보았는데, 역시 엉망으로 찍혔습니다.
 

다시 10분을 달려서 15시 50분.
그 사이 46번 국도는 용대삼거리에서 좌회하여 진부령으로 흩어지고,
미시령 새길은 56번 번호와 함께 직진합니다.
마침내 미시령 고개를 넘는 미시령 옛길로 갈 수 있다는 표지판이 나옵니다.
이제 우회전하여 56번 새길의 아래로 빠져서 구불구불 옛길로 미시령을 올라가면 됩니다.


미시령 터널을 뚫어 거리가 단축된 새길 덕분에 옛길은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 자전거로 넘어가기 좋은 길입니다.
다만, 문제는 엔진이 고갯길을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을 때에만 좋은 길이 된다는 겁니다.
3주전 답사때 고갯길을 못 와봤기 때문에 경사가 어느 정도인지, 과연 무정차로 갈 수 있을 지 확신이 없습니다.
경험자들의 글을 보면 미시령 정상까지의 경사길은 3km 남짓.
처음 미시령의 경사를 보면 기가 질려서 지레 포기할 수도 있으니까, 절대 고개를 들지 말라는 충고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중간 중간의 긴 고갯길들도 멀리서 보는 처음 순간에는
"저길 과연 내가 넘어갈 수 있을까" 하는 위축감을 느끼게 하였지만,
한 바퀴 두 바퀴씩 포기하지 않고 끈기있게 달려가서 보면,
어느 새 그 경사는 "한 번 해볼 만 하네" 하는 투지가 솟을 정도로 낮아져 있었습니다.

그 투지로 미시령을 넘어가보려 하는데......
역시 미시령은 경사가 만만치 않습니다.
헉헉거리면서 1*1단 기어로 500m 정도 올라왔는데,
좌측의 벼랑 낙석 방지 공사로 차선 하나를 막고 교차통행만 허용하고 있길래,
그걸 핑계로 가쁜 숨을 쉬어갑니다.
홍삼꿀물도 마시고, 하나 남은 비상식량 스니커즈도 먹어 치우고.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여볼까 길 옆으로 빠져서 몰래 소변도 봅니다.
다시 경사길을 낑낑 대면서 올라가 보지만, 이 놈의 저질 체력과 근력은 금새 바닥이 나고 맙니다.
완전히 퍼진 자리에서 올라온 길과 올라가야 할 길을 찍어봅니다.
저 아래 내설악이 보이고, 저 위에 미시령 정상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시간은 어느 덧 16시 20분.
마음은 바쁜데, 몸이 따라주질 못합니다.
 

끌바로 조금 더 가니 뜻하지 않은 내리막길이 나옵니다.
바닥난 체력에 다운을 칠 수 있을지 몰라서 별로 반갑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단축되는 시간을 생각해서 메리다 880의 안장에 올라 탑니다.
내리막길이 제법 깁니다.
이어서 나타나는 경사는 끌바로 갑니다.
그리고 미시령 정상이 어렴풋이 보이는 굽이길에 제법 큰 개울이 보입니다.
이때가 16시 30분.
그 자리에서 잠시 쉬면서 개울을 경사를 따라 좌, 우를 각각 찍어봅니다.
 

이제 남은 거리는 1km 정도나 될까요?(실제로는 500m 정도?)
미시령에서도 경사가 제일 가파른 구간입니다.
어쩔 수 없이 끌바를 합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못 견딜 정도로 숨이 가쁘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만일 내가 그동안 자출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 한 몸만 끌고 미시령 올라오기도 벅찼을 겁니다.

5분 뒤인 16시 35분. 드디어 해발 777m, 미시령 정상입니다.


드디어 미시령 정상에 올랐습니다. 비록 일부 구간 끌바를 했을 망정......
기쁜 마음에 또 한 번 잘 찍지도 못하는 셀카질을 해댑니다.
(차마 눈뜨고는 못 볼 몰골입니다... 흐...)


길 건너 휴게소에서 동해안과 속초를 배경으로 메리다 880을 찍어봤지만,
희뿌연 구름이 껴서 속초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오늘의 하이라이트 구간, 미시령에서 속초까지 15km 내리막길을 내려갑니다.
당초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해가 떨어지기 전에 내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다운힐 구간은 길기도 하거니와, 차량 통행량이 적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구간입니다.
물론 과속은 절대 금물입니다.
내려가는 구간 시작부분은 급경사라서 그런지
온통 모래를 깔아놓고, 승용차 브레이크 과열 주의 표지판으로 도배를 했습니다.
그 뒤로는 조금 완만해지면서 본격적인 다운힐 구간이 계속 이어집니다.
엉덩이를 최대한 뒤로 빼고, 몸은 최대한 낮추고, 양 손은 끊임없이 브레이크를 잡았다 풀었다 하면서
커브에서는 속도를 낮추고 몸으로 조향을 합니다.
페달은 자연스럽게 3시와 9시 방향이 되는데, 특히 뒷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갑니다.
컨트롤에 확신이 선다면 억지로 감속을 하는 게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초 속도 상한을 40km로 예정하고 브레이클를 계속 잡았으나, 순간 속도가 50km는 우습게 넘어갑니다.
어느새 미시령 터널 출구까지 한달음에 내려왔습니다.(최고 속도 55.8km)

한 숨 돌리고 나서 다시 다운힐을 칠 생각으로 디카를 꺼내 건너편 멋지게 생긴 봉우리를 찍어봅니다.


어, 그런데 디카 배터리 잔량 막대가 다시 2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디카의 충전 배터리가 추운 날씨에서는 제 기능을 발휘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오전의 똑딱이 디카 배터리 소동은 배터리가 문제가 아니라 기온이 문제였던 겁니다.

다시 5분쯤 내려와서 17시 정각.
학사평 저수지 맞은 편, 새길과 옛길의 합류 지점 쯤에서 설악산 봉우리들의 멋진 모습을 담습니다.
확실히 "악"자를 붙일 정도로 험한 봉우리들입니다.
풍수적으로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 모양의 "火山"입니다.
“불꽃" 메리다와 함께 찍었어야 했는데...


급경사는 아니지만, 내리막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즐겨 주면서 가는데, 꽤 가속도가 붙어서, 어느 내리막에서 페달을 놓쳤습니다.
순간적으로 자전거는 좌우로 롤링을 하고.
자칫 잘못하면 핸들이 더 불안정해지면서 자빠링으로 이어져 심한 부상이 발생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우선 좌우로 요동치는 프레임을 사타구니를 붙여서 조이고, 엉덩이를 더 빼고 몸을 더 낮춰서 진정을 시킵니다.
가속도가 붙을 때 급브레이크를 잡아서 줄이려 하다가는 이 역시 자빠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전방 시야를 충분히 확보하면서
무리없이 감속이 되도록 브레이크를 미세 조정하면서
조심스레 페달을 찾아 발을 얹습니다.

짧은 라이딩 경험에서 보건대
이처럼 다운힐 등의 가속 상황에서 페달을 놓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데,
이상하게도 각종 책자에서 이를 소개하고 대처 방안을 일러준 경우를 보지를 못 했습니다.
그 필자들은 평페달이 아니라 클립이나 클릿 페달이어서 페달을 놓치는 위험을 몰라서 그럴까요?
전문가들의 언급도 잘 안 보여서, 제가 소개한 방법이 정답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10분 뒤인 17시 10분.
학사평 교차로 오일뱅크 주유소의 상징 캐릭터에 나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는 문구가 보입니다.

"야호!!! 속초다!!!"



거리를 따져보니 143km 정도.
네이버 지도로 검색한 140km와 비교하면 생각보다는 오차가 적습니다.
한계터널 임시개통의 영향도 있는 거 같습니다.

이제 고속터미널에 가서 고속버스 표를 사고 바닷가 횟집에 가서 바닷가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돌아오면 됩니다.
그런데, 고속버스터미널 표지판이 안 보이길래 시외버스터미널 간판을 보고 찾아갑니다.
아마도 근처에 같이 있겠거니 합니다.
알고보니 시외버스 터미널은 구시가에 조그맣게 있고, 고속버스 터미널은 강릉 방향의 신시가지인 청호동에 있습니다.
다시 방향을 돌려 도심지를 통과하여 조양동, 청호동으로 향합니다.

속초 시내가 생각보다는 크고 깨끗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속초중앙시장의 골목길이 화려한 전등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과장되지도 않았고, 천박하게 장식되지도 않았고,
속초의 도심 이미지에 아주 잘 조화가 되는 전등 장식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사타구니가 쓸려서 페달질을 자주 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라,
큰 페달질로 속도를 올리고는 그 가속으로 좀 쥐고, 다시 가속하는 식으로 나아갑니다.

18시 조금 못 미쳐 고속터미널에 도착하여 차편을 확인하니 강남고속터미널 가는 차가 19시에 있습니다.
표를 사고 나와서 식당을 찾으니 원조 아바이마을 식당이 보입니다.
오늘 영양 보충을 제대로 못 했다는 생각에 오징어순대와 함흥냉면을 주문하였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오징어순대는 프라이 팬에서 기름에 데워져 나왔고,
냉면은 회는 괜찮았지만 육수는 심심하고 면은 질겼습니다.
그래도 평소처럼 싹싹 쓸어먹고 나와서 터미널로 가서 고속버스를 기다립니다.

거울 옆에 메리다 880을 기대놓았는데,
하얀 얼굴색의 앳된 숙녀 둘이 거울에 대고 셀카를 찍습니다.
이제 18~21살 정도 되어 보이는 두 아이들의 인상이 너무 깨끗해서 깜짝 놀랐지만,
뒤늦게 몰려오는 전신의 피로로 인해 디카나 핸드폰을 꺼낼 엄두조차 못 냅니다.
아니, 아예 찍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습니다.

잠시 버스 출발지를 확인하고 터미널 안으로 돌아 왔더니
왠 깔끔한 베이지 색상 프레임의 픽시(싱글 기어의 패션너블한 자전거)가 보입니다.
잠시 후 나타난 주인은 20대 중반의 대학생인듯 한데,
내가 픽시에 관심을 보이자, 문외한인줄 알고 픽시에 대해 요모조모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바이크에서 자전거로 넘어왔는데, 그 픽시는 꽤나 유명하며 가격이 15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브레이크가 안 달려 있는 픽시로 (클립으로) 어떻게 급제동을 하는 지를 직접 시범으로 보여줍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과 자전거를 만나 좋은 구경을 하였으나,
역시 디카나 핸드폰은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등고속버스는 5분전 쯤에야 손님들을 태웁니다.
혹시 짐칸에 자전거를 싣는데 운전기사가 까다롭게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냥 짐칸에 넣으면 된다고 합니다.
아무런 포장이나 그런거 안 해도 된다고 합니다.

강남고속터미널까지 주행시간은 3시간 20분.
좌석에 앉자마자 잠을 청합니다.
중간의 휴게소 정차때에도 버스에 남아서 잠을 잡니다.

10시 30분에 도착하여 반포터미널을 관통하여
서울성모병원앞 사거리에서 반포 래미안 퍼스티지를 끼고 가다가
반포천으로 내려가는 자전거도로 램프가 보이길래 그쪽으로 내려갑니다.
지난 가을에 한참 공사중이더니 이제 거의 마무리를 지은 모양입니다.
지자체들이 노는 듯 보이지만, 그래도 제 할 일들은 찾아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게 100% 만족할 만한 방향이나 수준이 되느냐는 별개로 하고 말입니다.

이수교 합수부에서 한강자전거도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옵니다.

오늘의 주행거리도 160km를 약간 넘어갈 거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센츄리 런(100마일)입니다.
최고 속도는 시속 55.8Km 정도이고, 평속은 20km 정도?
(로드에 달린
유선속도계(캣아이 벨로-5)에는 평속 표시가 안 나옵니다.)

한강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늘 하루를 되새겨 봅니다.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속초를 드디어 갔다 왔습니다.
나름대로 당일치기에 성공하기 위해 많은 후기들을 읽고 단출하게 나섰으나,
몇 가지 점들은 분명 준비 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미시령 정상까지 128km 구간중 마지막 1km 남짓 끌바를 했지만
"누구나 가지만 아무나 갔다 오지는 못 한다"는 속초를 갔다 왔습니다.

이제부터 두어 달 겨울동안 시즌을 접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안 그래도 저질 엔진이 원점으로 포맷될 수도 있겠지만,
속초를 다녀온 이상 분명 변화가 있을 거라고 자신을 응원해봅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합니다.
내가 그토록 속초 라이딩에 많은 것을 걸었다는 뜻일까요?

여의도에 접어들어 껌처럼 생긴 63빌딩을 보는 순간, 내 허전함의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아!!!  속초에서 껌 사는거 까먹었다!!!



(위 왼쪽 모델은 "’마이클 판타니의 해지고 어두운 토요일밤’의 번짱 마이클 판타니옹입니다.
 오른쪽 모델은? 모르겠네요.)







(아래 사진의 위쪽 모델은 야니님)